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심방세동(A-fib) 환자에게 카페인 섭취는 오랫동안 ‘금기’처럼 여겨져 왔다. 카페인이 심박수를 높이고 혈압을 상승시켜 심장 리듬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새로운 임상 연구 결과, 하루 한 잔 정도의 커피는 전혀 해롭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심방세동의 재발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번 연구는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UCSF)의 심장 전문의 그레고리 마커스(Gregory Marcus) 교수가 주도한 ‘디카프(DECAF·Does Eliminating Coffee Avoid Fibrillation?)’ 임상시험의 결과다. 연구 결과는 10일(현지시간) 미국심장협회(AHA) 연례 학술대회에서 공개됐으며, 세계적 의학 학술지 자마(JAMA)에 동시에 게재됐다. 마커스 교수는 “심방세동 환자들이 의사의 권유에 따라 커피를 끊는 경우가 많지만, 지금까지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는 매우 부족했다”며 “이번 연구를 통해 카페인이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심장 리듬 안정에 도움이 될 가능성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에서 최근 5년 이내 정기적으로 커피를 마신 경험이 있는 200명의 고령 참가자를 모집했다. 평균 연령은 70세, 여성 비율은 약 33%였다. 모든 참가자는 과거 심방세동 진단을 받았으나, 현재는 증상이 안정된 상태였다. 연구는 6개월간 진행됐으며, 참가자들은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한 그룹은 카페인을 완전히 끊도록 했고, 다른 그룹은 매일 최소 한 잔의 커피를 마시도록 했다.
참가자들은 1개월, 3개월, 6개월 차에 원격 진료(화상 상담)를 통해 카페인 섭취량을 보고했다. 연구진은 심전도(ECG), 착용형 심박 모니터, 이식형 심장 기기 등을 통해 심방세동 또는 유사 질환인 ‘심방조동(atrial flutter)’의 재발 여부를 면밀히 추적했다. 그 결과는 의외였다. 전체 참가자의 56%가 연구 기간 중 심방세동이나 심방조동을 다시 경험했으나, 커피를 마신 그룹의 재발률은 47%로, 커피를 끊은 그룹(64%)보다 현저히 낮았다. 또한 커피를 마신 그룹은 첫 재발까지 걸린 기간도 더 길어, 상대적으로 안정된 심장 리듬을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마커스 교수는 “이번 연구는 단순한 관찰 연구가 아닌 임상시험으로, 커피와 심방세동 간의 인과관계를 직접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며 “카페인 커피가 재발을 억제하는 정도가 생각보다 강해 놀랐다”고 말했다. 이전까지의 연구는 대부분 ‘커피를 마시는 사람의 심방세동 발생률이 낮다’는 통계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번에는 실제로 커피 섭취 여부를 통제한 무작위 임상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 방식으로 진행돼 신뢰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뉴욕 마운트사이내이 푸스터 심장병원의 요한나 콘트레라스(Johanna Contreras) 심장 전문의는 “이번 연구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커피가 심방세동 환자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이라며 “카페인이 반드시 심장에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의학적으로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다만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개인별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며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반드시 치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당한 섭취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연구팀은 커피 외의 카페인 음료(에너지음료 등)에 대한 영향은 평가하지 않았으며, 참가자들의 운동 습관이나 식단 차이도 고려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마커스 교수는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더 활동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인도 결과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번 연구는 심방세동이 조절된 환자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현재 증상이 진행 중인 환자에게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마커스 교수는 “심방세동이 활성 상태인 환자가 카페인을 섭취하면 일시적으로 맥박이 더 빨라져 증상이 심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콘트레라스 박사는 “결국 핵심은 ‘적정 섭취’”라며 “하루 한두 잔 정도는 안전하지만, 여섯 잔 이상을 마시거나 에너지드링크를 함께 섭취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커피의 보호 효과가 카페인 때문인지, 아니면 커피 속의 항염증 성분이나 항산화 물질 때문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마커스 교수는 “카페인이 아드레날린 반응을 유도해 심방세동이 흔히 발생하는 ‘이완 상태(rest and digest)’를 방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즉, 커피를 마시면 신체가 각성 상태로 전환돼 심장의 불규칙한 수축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명 이상이 앓고 있는 심방세동 환자들에게 큰 의미를 갖는다. 심방세동은 단순한 ‘심장이 두근거리는 병’이 아니라, 뇌졸중·혈전·심부전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주요 심혈관 질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 중 상당수는 의사의 지시나 불안감 때문에 일상적인 커피 섭취를 중단해 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그러한 ‘금기’의 근거를 뒤집었다. 커피를 마신다고 심장이 불안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오히려 일정량의 커피가 심방세동 재발을 줄일 수도 있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콘트레라스 박사는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시던 사람이라면, 심방세동 병력이 있더라도 하루 한 잔 정도는 안심하고 마셔도 된다”며 “커피는 이제 더 이상 피해야 할 음료가 아니라, 건강한 생활 속의 일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다만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던 사람에게 새롭게 권장할 단계는 아니며, 개인의 체질과 약물 복용 여부, 수면 상태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DECAF 연구는 향후 심방세동 환자의 식이요법과 생활 습관 지침을 다시 설계하는 데 기초 자료로 활용될 전망이다. 마커스 교수는 “앞으로는 커피를 무조건 금지하기보다, 환자의 상태에 맞춰 개별화된 조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요약하자면, 커피는 심방세동 환자의 적이 아니다. 하루 한 잔의 커피는 심장 건강에 해롭지 않으며, 적당량의 섭취는 오히려 심장 리듬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연구의 결론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원칙만 지킨다면, 심방세동 환자에게도 커피 한 잔의 여유는 충분히 허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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